조상님 이야기-죽산최씨 대동보

2022. 8. 27. 09:18범부의 60년 이야기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인류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지만 나의 개인적인 역사에 대해서도 평소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 한 사람의 역사는 우리 가정의 역사가 되고 최 씨 집안의 일원인 내 가정의 역사는 결국 최 씨 문중 역사의 일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먼저 조상님 이야기.

나의 관향은 죽산이다.

죽산은 현재 안성시 죽산읍을 말하는데 수많은 최 씨 중의 일파이다.

최 씨의 시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모두 신라 박혁거세 시기의 돌산 고허촌장인 소벌도리 공을 지목하고 있는데 소 씨나 정 씨 같은 다른 성씨들도 소벌도리 공을 자신의 시조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그런 소벌도리 공은 고조선의 유민이라고 하는데 이를 입증할 문헌자료는 없는 것 같다.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6부 촌장을 천강인, 즉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북방 기마민족은 자신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자손들이라고 한다고 하니 북방에서 이주한 이주민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단군신화도 천강 신화의 전형임을 상기하면 좋을 듯 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이사금 왕 시기에 신라 6부에 성을 하사하였는데 양산부는 이 씨를, 고허부는 최 씨를, 대수부는 손 씨를, 간진부는 정 씨를, 가리부는 배 씨를, 명활부는 설 씨를 주었다고 한다.

어릴 때 서가에 꽂혀 있던 전설 이야기에서 본 최 씨의 시조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경주의 한 귀족에게 딸이 있었는데 밤마다 딸의 집으로 괴한이 침입하여 딸과 상관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에 과년한 딸은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남자의 존재를 알아내기 위해 밤 늦게 찾아온 남자의 옷자락에 바늘로 실을 꿰어 놓았다.
 
남자가 다시 홀연히 사라지자 실은 한없이 풀려 나갔다.

날이 밝자 아버지와 딸이 실을 따라 쫓아가보니 산 속의 깊은 굴이었는데 그곳에서는 천년 묵은 멧돼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딸은 임신하였고 출산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최 씨 성을 주었다고 한다.

최(崔)자를 파자해 보면 산(山) 아래 땅(土+土)이 있고 그 옆에 사람(人)이 있으니 얼추 비슷한 느낌이 온다.

따라서 최 씨의 조상은 천년 묵은 멧돼지인 것인가?

이것은 당시 산에 사는 유명한 평민-아마도 이름난 산적(?)과 귀족 딸과의 결혼 이야기가 야담으로 와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신라시대 최치원은 소벌도리 공의 23대손이라고 하며 모든 최 씨는 경주 최 씨에서 분기되어 나왔다고 본다.

최 씨 중 유명한 문중은 원조인 경주 최 씨와 고려 무신정권을 수립했던 해주 최 씨 그리고 강릉 최 씨가 있다.

그럼 내가 속해 있는 죽산 최 씨의 시조는 누구일까?

역시 정확한 문헌 자료는 없으나 해주 최 씨 최충의 자손인 최서 라고 한다.
 
내가 속한 최 씨의 세거지는 경북 구미시 선산인데 일부 다른 죽산 최 씨 문중에서는 우리 문중을 강릉 최 씨에서 분가한 것으로 적고 있기도 하다.

이제 시야를 좁혀 우리 문중을 이야기해 보자.

1대조는 미수공의 부친으로 양덕 공이시다.

2대조는 선산으로 들어와 우리 문중을 일으키신 미수 공이시다.

1995년 처음 책자로 만들어진 대동보에 따르면 임진왜란으로 인해 서울 인근이 피폐해지자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따라 식솔을 인도하여 선산의 무래방에 안착하셨다고 한다.

미수 할아버지의 산소는 종가 뒷산 가운데에 있어 자주 참배하던 곳이다.

이후 1642년 인조 20년에 태어나신 두명 공 이후에는 현재의 북둔촌-뒷덤으로 이거 하신 것으로 보인다.

집안에 보관 중인 교지로 급제가 확인되는 조상님은 두명 공이시다.

다른 윗대 조상님들의 등과 교지는 실전하여 없고 전언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자료는 용징공께서 북둔방에 세거하실 때 자료로 호구조사표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당시 1대부터 시작하여 1995년 대동보 작성 당시 17대까지 우리 대동보에 등재된 문중은 모두 635명이다.

그중 남자는 393명, 여자는 242명.

생몰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문중의 평균수명은 66.2세인데, 그중 남자는 64.1세, 여자는 69.3세이다.

1800년대까지 남자 문중 50명 중 22명이 관직을 받아 44%에 이르렀으며 최고위직은 종이품이고 가장 많은 직위는 정오품이었다.

대체로 자손이 귀해 독자로 대가 이어오다가 11대 때부터 자손이 번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 가문은 비록 영의정이나 왕비를 배출한 권문세가는 아닐지언정 대동보에서 백부께서 밝히신 대로 우리나라 유생의 절반이 경상도에서 나고 경상도 유생의 절반이 선산부에서 나온다는 말대로 유풍이 강했던 선산부에서 400여 년 동안 끈기 있게 기호학파의 가풍을 이어온 당당한 가문이었다고 하겠다.

생각컨데 2000년 전 나의 조상은 말을 타고 드넓은 초원을 내달리던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누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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