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28-크로아티아-스위스-여행계획짜기

2022. 7. 24. 13:37해외여행

해프닝이 많았던 동유럽 여행이 끝이 나고 가을이 되었을 때 우리 부부에게는 다시 역마살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대구 형님이 2019년에는 환갑이 되었다.

형님은 조그만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늘상 일에 치여 제대로 된 해외여행을 다녀오지 못한 것이 처형에게는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아내가 대구 처형 부부와 우리가 같이 여행을 가면 어떻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다고 말해 주었다.

우리 부부만 여행 갈 경우에는 파리와 바르셀로나가 유력했지만 처형 내외가 합류하게 되면 박물관과 성당뿐인 이 두 도시는 별로라 아무래도 sight-seeing 경치 관람 위주로 여행 코스를 짜야 할 것 같았다.

더구나 대구 형님이 벌여놓은 일이 많은 관계로 2주간의 일정은 절대 불가하다고 하여 불가피하게 여행 일정도 예년과 달리 축소해야 할 형편이었다.

유럽에서 자연경관이 좋은 곳은 스위스와 크로아티아 정도였다.

북유럽이나 포르투갈 등도 자연경관이 좋았지만 여행 시기나 이동거리 등을 계산할 때 선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였다.

여러 가지를 고민한 끝에 자그레브로 들어가서 라스토케, 플리트비체, 자다르, 스플리트, 두브로브니크로 크로아티아를 종단한 다음 두브로브니크에서 스위스의 취리히로 넘어가 융프라우를 구경하는 것으로 여행지를 결정하였다.

여행 시기는 예년과 같이 5월 말에서 6월 초로 정하였으나 여행 기간은 대구 형님의 사정을 고려하여 10박 12일, 화요일 새벽에 출발하여 토요일 귀국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10박 12일의 경우 관광지 등을 감안할 때 크로아티아 5박 스위스 5박으로 분배하는 것이 타당했으나 두브로브니크에서 취리히로 가는 직항 비행기 편이 마땅하지 않아 불가피하게 크로아티아에서의 체류를 하루 더 늘이고 스위스는 줄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행 일정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던 10월 즈음이었을까 아내는 구미에 살고 있는 처제에게 이런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같이 가겠냐고 물어보았고 처제 내외도 같이 가겠다고 하였다.

안계에 살고 계시는 큰 처형 내외분께 이야기했을 때는 농사일 때문에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으나 평촌에 혼자 살고 있는 처형에게 권했을 때는 조카가 강력하게 가라고 권해 7명이 여행을 가게 되었다.

일이 커져 버렸다.

우선 숙소가 문제였다.

 

이번에도 숙소는 에어비엔비로 정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한 집에 7명이 한꺼번에 잘만큼 큰 집이 많지 않았다.

결국 방이 4개 있는 숙소를 찾기는 불가능해서 방이 3개인 숙소를 고를 수밖에 없었고 한 방에는 불가피하게 3명이 같이 자야 하는 불편함이 생겼다.

화장실도 문제여서 숙소에 화장실이 2개는 있어야 했으나 스위스 숙소는 하나의 화장실 밖에 없어서 서로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7 식구의 도시 간 이동은 오히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렌터카로 낙착될 수밖에 없었고 여행 경비를 절감할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2019년 1월이 되었다.

항공권을 결제해야 할 때였다.

 

우리는 작년 동유럽여행에서 폴란드 항공의 쓰라린 경험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 이번엔 비싸더라도 중동항공사로 가기로 하고 카타르 항공을 선택하였다.

자그레브 공항이나 취리히 공항은 많은 항공사가 취항하는 대형 공항이 아니어서인지 항공권 가격이 95만 원으로 비쌌다.

 

카타르 항공권을 구매한 즉시 두브로브니크에서 취리히로 가는 편도 항공권을 결제했다.

1인당 29만 원.

저가항공이 몇 편 있었으나 수하물 비용이 별도여서 그 가격이 그 가격인지라 스위스항공으로 결제하였다.

숙소도 결정하였는데 다른 도시는 평범한 수준이었으나 두브로브니크의 숙박비는 2박에 50만 원, 스위스 인터라켄의 숙박비는 4박에 190만 원으로 정말 비쌌다.

그나마 7명 단체여서 1인당 숙박 단가는 낮아질 수 있었다.

1월 초순에 항공권과 숙소 예약을 마치고 난 후 1월 말이 되었을 때 공단 본부에서 시달된 문서 때문에 나는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지금까지 8월 하순에 실시되던 을지훈련이 올해부터는 5월 말로 변경되니 그 기간 동안 휴가를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휴가 금지는 늘상 하던 당연한 이야기겠거니 하고 무심하게 넘겼다.

그러나 막상 여행이 시작되려는 4월 말에 다시 징계까지 거론하는 강도 높은 문구로 재차 휴가 금지 공문이 시달되었다.

1주일 정도는 정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고민스러웠다.

민감한 성격의 소유자인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봐야 나보다 더 괴로워하며 잠을 설칠 것이 분명해서 끝까지 함구하였다.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할 수 있었다.

여행 시기를 1주일 연장하는 방안...

 

항공권 변경의 경우 최소 50만 원의 비용이 소요되어 전체적으로 350만 원의 비용이 추가로 들었다.

내가 여행에서 빠지는 방안...

 

여행 자체를 취소하는 것과 같은 결과로 역시 같은 수준의 비용이 들었다.

취소의 경우에는 비용은 둘째 치더라도 모처럼의 해외여행에 들떠 있을 다른 가족들의 실망이 더 커 보였다.

결국 여행을 강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행을 강행한 후의 문제는...

 

지사장에서 강임 되어 1급지 부장으로 전보되거나 견책이나 주의의 징계가 예상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그럴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여행을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소명하고, 나의 소명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최악의 경우에는 외부기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고는 마음을 편히 가졌다.

이를 위해 나는 휴가 금지 문서 시행 전에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한 카드 결제 내역을 증거자료로 준비해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을지훈련의 변경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는지 전국의 직원들이 불만을 제기하여 결국 노동조합까지 나서게 되었고 여행 시작 며칠 전 휴가는 자율에 맡긴다는 문서가 시행되어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의 무거운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 주었다.

그런데 출발을 한 달여를 앞두고 또 다른 문제가 내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동안 으르렁거리기만 했던 미국과 이란의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져 전쟁 직전까지 가는 상황으로 번졌다.

우리가 경유하는 카타르항공의 도하 공항은 전쟁이 터진다면 가장 위험한 지역 내에 있는 곳이라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1990년인가 미국과 이란이 한참 전쟁 직전까지 갔을 때 미군이 이란의 민간 항공기를 전투기로 오인하여 미사일을 발사하여 격추하는 바람에 250명에 달하는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사실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런 끔찍한 상상으로 며칠간의 밤잠을 설쳐야 했다.

다행히 이 글을 쓰고 있으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평화의 소중함은 언제나 최상의 가치임에 틀림없다.

해외에서 차를 빌려 운전해 보기는 오키나와 자유여행 때 이후 처음이었다.

우선 허츠와 렌트카닷컴 등을 통해 가격을 알아보니 180만 원이 필요했다.

좀 더 저렴한 회사가 없을까 검색하다가 유니 렌터카라는 현지 업체를 알게 되어 100만 원으로 예약을 마쳤다.

7명이 타야 했으므로 9인승을 빌렸는데 벤츠 비스토였다.

결과적으로 비용은 절약했으나 처음 차량을 인수했을 때 차량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한숨이 나왔다.

물론 여행 기간 내내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지만 이동에는 비용을 아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또 아내는 승용차만 운전하다가 대형차량을 운전할 수 있냐며 걱정이 늘어졌고 차량의 유리창을 깨고 가방을 훔쳐 가는 도둑도 있다는 나의 이야기에는 빌린 차의 트렁크에 가방을 몇 개 넣을 수 있는지, 가방이 보이지 않게 검은 천을 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을 냈다.

아내의 걱정과는 달리 크로아티아에서는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당초 5박이면 좋았을 크로아티아에서 일요일 취리히로 이동하는 직항 항공편이 없는 관계로 부득이하게 하루 더 연장하여 6박을 하게 되어 일정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구미 처제가 보스니아의 메주고리예를 방문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해 왔다.

 

메주고리예는 가장 최근에 성모님이 발현한 곳으로 전 세계에서 순례객들이 모여들고 있는 곳이었다.

일부러 방문하기도 어려운데 가는 길에 들렸다가 가면 좋을 것 같기는 했지만 4명의 신앙은 가톨릭이나 대구 처형 내외와 평촌 처형은 가톨릭 신앙이 없어서 조금은 꺼려졌다.

 

하지만 여행의 모든 사항에 대해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에 힘입어 나는 가기로 결정하고 세계적 순례지임을 핑계로 비신앙인인 3명의 동의를 억지로 구했다.

또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스위스 항공의 출발시간이 오후 2시에서 오전 9시로 변경되었다.

아마도 승객이 많지 않아 다른 항공편과 합쳐진 것 같았다.

이로 인해 크로아티아 체류시간이 반나절 줄어들어 스위스에서의 체류시간을 조금 더 확보할 수 있게 되어 보다 알찬 여행 계획을 짤 수 있었다.

이로써 출발 두 달 전에 모든 일정이 확정되어 출발할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아내를 비롯한 여성 동지 4명은 수시로 전화하며 여행 기간 동안 식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한 것 같았다.

우리야 한식이던 양식이던 가리지 않고 잘 먹어 문제가 없으나 대구 처형 내외나 구미 동서 같은 경우에는 한식을 먹지 않으면 속이 불편하다고 하니 장기간의 유럽여행에는 적합하지 않은 입맛이었다.

 

우리는 라면 21개와 누룽지 2kg을 준비하기로 하고 대구 처형은 고추장볶음, 된장 볶음, 기타 밑반찬을 준비하고 평촌 처형은 오이지무침을 준비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또 아내는 출발하기 전까지 크로아티아와 스위스의 기온을 체크하며 어떤 옷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고민하다가 결국엔 가방 한가득 봄철 옷과 겨울철 옷을 챙겨 넣었다.

나는 국제면허증과 유심칩을 사두었고 핸드폰을 내비게이션으로 쓰기 위해 핸드폰 거치대를 준비해 두었다.

차량용 충전기는 찾다가 찾다가 못 찾아 구미 처제의 충전기를 빌리기로 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특이한 것이 스위스 숙박업소에서 180만 원의 요금을 현금으로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나는 하루하루 변하는 스위스 환율을 검색하며 현금으로 들고 갈지 현지에서 출금할지 고민하였다.

환전할 경우 크로아티아에서 현금을 들고 다녀야 하는 부담이 있고 스위스프랑은 유로나 달러와 달리 취급점이 많지 않아 공항에서 찾아야 하는데 비행기 출발시간이 은행 마감시간 이후라 공항에서 찾기도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환율도 최저점을 찍고 오르기만 해서 체크카드와 현금카드를 들고 가서 현지에서 출금해 주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런 나의 결정은 환율 상승과 발급받은 체크카드에 대한 무지로 인해 근 20만 원의 손해를 보는 패착으로 이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