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06-베네치아-아드리아호텔

2022. 7. 12. 17:30해외여행

여행객에게는 은혜로움 그 자체인, 베로나 시가지 중심에 있던 맥도널드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무료 화장실도 이용한 다음 베니스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무사히 메스트레 역에서 내렸다.

베니스 가는데 웬 메스트레 하겠지만 베니스행 열차의 종착역은 당연히 베니스 중앙역이다.

 

그러나 숙소를 예약하기 위해 호텔을 알아보았을 때 베니스 구시가지 안에 있는 호텔 숙박비는 엄청난 수준을 보여 주고 있었고 방의 상태도 그리 좋은 수준이 아니었다.

한인 민박 또한 비슷한 수준으로 높은 가격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위치 또한 역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차량 통행이 전혀 불가능한 구시가지의 울퉁불퉁한 도로 위로 무거운 여행 가방을 끌고 이동해야 하는 고통은 덤이었다.

또 구시가지 숙소에 묵었던 선배 여행객들의 후기에 따르면 날이 더워질수록 바다에서 나는 하수구 냄새 비슷한 악취 때문에 잠자기에 고통스러웠다는 이야기도 있어 냄새에 민감한 아내에게는 권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저런 이유로 가장 가까운 역인 메스트레 지역 인근에 있는 가성비 좋은 호텔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는 호텔을 나서서 5분 정도 걸으면 만나게 되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20분 후에 베니스의 로마 광장에 도착할 수 있고 그도 불편하면 10분 정도 걸어 도착하는 역에서 20-30분 간격으로 있는 기차를 타고 베니스 중앙역으로 갈 수도 있어 편리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출국 전 검색해 두었던 맛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은 식당이라기보다는 선술집 같은 곳이었는데 그나마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어서 식당 밖에까지 술과 안주를 든 현지인들로 넘쳐났다.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중식당을 발견하였다.

어딜 가도 중국인과 중식당을 만날 수 있었지만 이런 곳에서 발견할 줄은 예상하지 못하였던 우리는 더욱이 그 간판에 쓰인 한글 짜장면과 짬뽕을 보고서는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여기를 방문해서 짜장면이나 짬뽕을 외쳤으면 이 중식당의 메뉴까지도 바꿔 놓았을까 생각하며 그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이름은 리스토란테 오리엔탈레였다.

국물 요리가 그리워져 있을 때라 짬뽕을 주문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먹던 칼칼한 맛은 적었으나 야채도 풍성했고 해물도 적당히 들어 있어 한식에 주린 우리의 배를 채워 주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흘을 묵는 것으로 이탈리아 일정의 대미를 장식하기로 하였다.

사흘이라고 하나 마지막 하루는 귀국 일정이므로 실제적으로 관광할 수 있는 시간은 만 48시간, 이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걸어서 올드 타운을 구경하고 나머지 하루는 베포라토 라고 하는 일종의 일일 교통권을 이용하여 배를 타고 무라노 섬, 부라노 섬과 카날 그란데라고 하는 S자로 베네치아의 도심을 굽이치는 수로를 다녀보기로 하였다.

이곳에서 유명한 것이 곤돌라라고 하는 옛날 배를 타고 잘 생긴 노잡이 곤돌리에의 낭랑한 칸초네를 들어 보는 것인데 그 가격이 만만치 않다.

30분 정도 4명이서 이용하는데 10만 원 이상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하니 둘 밖에 없는 우리에겐 그림의 떡으로 여겨졌고 안전한 큰 배로 카날 그란데를 경험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한해 수 천만 명이 방문한다는 유명 관광지인 만큼 교통관련 시스템은 잘 되어 있어서 별로 크지 않은 호텔임에도 불구하고 버스 1회 권 티켓이나 기차표 그리고 베포라토 티켓도 리셉션에서 카드로 살 수 있었다.

물론 베네치아 역 앞에 있는 티켓 판매소에서도 살 수 있으나 수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긴 줄 끝에 서야 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베니스! 베네치아~~

시오노 나나미가 쓴 바다 도시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베네치아는 1300년 동안 공화정을 유지했던 유럽의 강소 독립국이었다고 한다.

비록 도시국가이긴 하지만 한 나라가 1천 년 이상의 국가체제를 변함없이 유지했다는 것은 세계 역사에서 쉽게 찾기 어려운 일이다.

로마제국 천년의 역사도 공화정에서 왕정으로, 왕정에서 다시 공화정으로, 유럽인들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항상 1순위에 지명한다는 카이사르 시저 이후에는 다시 제국으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국체를 바꾸어가면서 변신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백년이 지난 576년에 이곳에 침입한 야만인을 피하기 위해 아드리아 해의 갯벌에 말뚝을 박아 집을 짓고 피난생활을 시작한 것에서 시작되어 1797년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독립적 지위를 잃을 때까지 베네치아는 당시 동시대의 유럽인으로부터 경제동물이라는 경멸에 찬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후추로 대표되는 동서양 중계무역기지로 유럽 최고 수준의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뻘 위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생선 외에는 먹을거리가 없었을 자연환경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중개무역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심정을 알 수 있고 그런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당대 최고의 경제력과 해군력,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고 여겨졌다.

우리는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조선왕조 600년을 폄훼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한 나라가 성립하여 600년을 지속했다는 것은 그 정치체제가 다수의 구성원으로부터 지지를 얻어냈다는 것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600년의 두 배가 넘는 기나긴 기간 동안 도시국가 형태이긴 했지만 베네치아가 국체를 변경하지도 않고 수많은 외부로부터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지탱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배경이 무엇일까?

먼저 견제와 균형이라는 원칙에 부합되게 잘 조직된 지배 구조와 다소 형식적이긴 하지만 국가의 중요 정책을 산 마르코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의사에 따라 최종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전통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지도층의 솔선수범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국가적 규모의 환란이 발생하면 베네치아 정부는 일종의 세금인 국채를 발행하였다고 하는데 가장 많은 국채를 먼저 사는 사람들은 사회 지도층인 귀족이었다고 한다.

또 수많은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것을 피할 수 없는데 그들 중 다수는 귀족의 자제로 우리로 치면 병역의무를 게을리한 귀족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귀족이 사망하면 유족에 대한 연금은 없으나 일반 병사의 사망 시에는 그 유족에게 종신연금을 지급하는 복지제도도 있었다고 한다.

베네치아의 빈부격차는 당시 유럽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덜했다고 하며 실패한 사람에게도 국가로부터 자금을 빌려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한다.

사회적으로는 마녀사냥 같은 종교적 광풍이 유럽을 휘몰아칠 때에도 이곳 베네치아에서는 정교분리 원칙이 확립되어 있었고 출판이나 사상의 자유도 광범위하게 인정되어 유럽의 금서를 이곳 베네치아에서는 얼마든지 사서 볼 수 있었다고 하니 베네치아 시민들이 국가의 존재를 얼마나 든든하게 여기고 그 국체를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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