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21. 16:33ㆍ책읽기
AD 452년 ~ AD 1797년.
무려 1300여 년 동안이나 동일한 공화국 국체를 유지하며 중세 유럽을 풍미한 도시국가 베네치아.
이 책은 베네치아 1345년의 역사를 관통하며 흘러온 인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 류의 역사서를 좋지 않게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원전을 읽는 부담 없이 한 나라의 역사를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어 좋았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훈족 아틸라의 내습으로 로마제국이 위기에 빠졌을 때부터 시작한다.
이탈리아 북부에 있어 제일 먼저 피습을 받았을 당시 주민들이 마을을 지도하던 사제의 지휘로 키오자의 뻘 지대로 살기 위해 도망쳐 마을을 세운 것이 베네치아의 시작이었다.
이후 지금의 산타마리아 역 인근 뻘지대로 다시 이주하여 본격적인 베네치아 공화국 시대를 열게 된다.
말이 1300년이지 그 긴긴 세월 동안 비록 작은 도시국가라 하더라도 공화국의 국체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워 보인다.
그럼에도 그 기간 동안 국체를 변경하려는 반역의 음모가 단 두 번에 그쳤고, 그것도 고도로 발달한 비밀경찰의 촉수에 발각되어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은 최대 3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도시국가 시민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주어진 자연환경이 뻘과 바다였던 만큼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먼저 마실 물을 마련하는 것.
다행히 지형이 알프스산맥이 북쪽으로 이어져 있어 비가 많은 지역인지라 빗물을 모아 식수를 해결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식량.
이것은 살기 위한 집을 지을 공간도 부족했으므로 자연히 다른 지역과의 교역을 통해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와 역시 바다가 주는 광물인 소금을 인근 지역과 교역을 통해 식량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이처럼 태생적으로 불리한 여건은 베네치아를 교역의 도시로 만들었고 중세를 거치며 동방과의 중개 무역지로 발전하게 된 토대가 되었다.
인적 자원이 부족했던 도시국가인 만큼 무역에는 전 시민이 역할을 분담하여 참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국가의 사활을 건 대외 전쟁의 경우에도 모든 시민이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당연히 귀족계급이 먼저 희생함으로써 시민사회의 건전성을 유지해 나왔다.
베네치아가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상업도시국가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종교와의 적절한 거리 두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산마르코 대성당은 다른 여타 도시와 달리 주교좌성당이 아닌 베네치아 원수인 도제의 개인 성당이자 도시민 전체의 성당인 것을 보아도 베네치아의 종교관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베네치아에서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마녀사냥이라는 종교적 광기도 볼 수 없었고 유럽의 분열을 초래했던 교황파와 황제파의 갈등도 없었다.
르네상스 시대 여러 나라의 금서는 베네치아에서는 자유롭게 출판되어 지식의 요람이 되었다.
그리고 시민 전체의 재능을 하나로 묶어내는 여러 사회제도가 있었다.
낮은 이율로 돈을 빌려주어 장사의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배려해 주고, 국가의 위기가 발생하였을 때는 부유한 귀족들을 대상으로 특별 세금을 징수하였고 대외 전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미망인이나 고아에 대한 연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운용하기도 하였다.
다만 유족연금 지급 대상에는 귀족은 제외하였다고 하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사회적으로 정착시킨 예라고 하겠다.
교역에 생존이 달렸던 국가인 만큼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교황의 파문이나 다른 나라의 비난을 감수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유럽의 경제동물이라는 말이 그럴듯해 보였다.
따라서 교역상대국에 대한 정보 파악은 그들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에 현대의 각종 외교관례들-대사관 설치, 대사 파견, 전권 특사 제도 등등이 모두 베네치아의 제도를 받아들인 결과이다.
후추로 대표되는 동방무역이 대항해 시대 이후 대서양 시대로 접어듦에 따라 베네치아의 경제력도 기울기 시작한다.
잠시 동안 직조업이나 농업 등으로 변신을 시도하지만 이미 시대는 지중해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하나의 거대한 근대 시민국가로 변모해 갈 즈음에 베네치아라는 도시국가도 그 운명을 다했다.
베네치아의 독립을 빼앗아 간 것이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게 되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라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베네치아라는 인간의 삶의 결과물의 가치를 꿰뚫어 본 나폴레옹에 의해 파괴나 약탈과 같은 폭력적 패망 과정 없이 잘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생로병사는 모든 생명이 가지는 숙명이다.
국가 사회도 인간이 모여 만든 생명체의 다른 모습이므로 태어나고 성장하고 병들고 망하는 그 과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베네치아도 외적의 침입이라는 위기에서 시작하여 교역으로 성장하였고 거대 근대 시민국가로의 성장이 막히자 병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유구한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2017년 첫 유럽여행지로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그 여행의 마지막 도시가 베네치아였다.
이 책을 그전에 읽고 갔었더라면 아마도 가슴으로 전해지는 감흥이 더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배경지식 없이도 베네치아는 매력적인 도시임에 틀림없다.
6월의 따뜻한 햇살 아래 바다 위에 펼쳐진 신기루 같은 건물들.
당시 유럽에서 제일 부유했던 도시의 결과물인 아름다운 성당 건축물들.
좁고 긴 미로 끝에 나타나는 조그만 광장과 이름 모를 성당.
지금도 후추 향기가 날 것 같은 무지개 모양의 리알토 다리.
그 위에서 바라보는 카날 그랑데와 잔잔한 파도에 바로 면한 4~5층의 석조 건물들.
약간은 비릿한 듯한 바다 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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