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31. 19:21ㆍ해외여행-크로아티아.스위스
6월 1일 토요일,
오늘은 메주고리예를 거쳐 두브로브니크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메주고리예는 보스니아에 있는데 우리는 보스니아를 말하면 바로 내전을 떠올린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정식 국가 명칭인 보스니아는 과거 로마의 식민 지배 이래 수많은 민족들이 거쳐 간 관계로 오스만튀르크의 이슬람 문화와 세르비아의 정교 그리고 크로아티아의 로마 가톨릭으로 종교마저 갈라져 야심가의 선동에 따라 수많은 전쟁이 발생해 이곳 주민들의 피를 쏟게 만든 아픈 역사의 땅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인종과 종교의 편견으로 인해 끊임없이 이어질 피 흘림을 예견하셨던 것일까?
1981년 한적한 시골마을인 이 메주고리예의 크리니카 산에 성모님이 6명의 소년소녀들에게 발현하여 세계 평화가 위협을 받고 있으니 기도와 보속을 하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고 한다.
메주고리예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면 당시 지도 신부와 어린 소년소녀 6명이 주고받았던 질문과 답변이 자세히 나와 있다.
하지만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시절이었던 이 땅에서 성모님 발현을 편지로 외부에 전했던 토모슬라프 신부는 공산정부로부터 징역형을 선고받는 고난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 이 땅에는 전쟁의 광풍이 몰아쳐 1992년부터 1995년까지 3년 동안 30여만 명이 희생되는 참혹한 전쟁터가 되었다.
평화협정으로 전쟁이 끝난 뒤 산과 산 사이라는 뜻의 한적한 산골마을이었던 이곳 메주고리예는 전 세계로부터 순례객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운전은 대구 형님이 맡았다.
뒤에 있는 자매들은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안되었다는 설명에 납치의 불안에 떨었지만 나는 블로그에서 보았던 국경 통과와 험한 도로가 걱정이 되었다.
어제 올 때 보았던 큰 바위산을 다시 좌측으로 보면서 고속도로로 올라갔다.
제한속도가 시속 130Km인 크로아티아의 고속도로는 통행량이 많지 않아서 과속하기 좋았지만 도로 중간중간에 최고 속도가 100Km 이하로 제한되는 구간이 나타나기 때문에 우측의 속도제한 표시를 확인하면서 달려야 한다.
다행히 우리는 한 번도 경찰차를 만나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 검문소 앞에는 대형버스들이 보스니아로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 우리도 본능적으로 줄을 서기 위해 버스 뒤에 정차했다.
그런데 옆으로 소형 승용차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단체관광객과 소수의 개인관광객을 분리해서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차선을 바꾸어 앞차를 따라갔다.
모를 때는 선배를 따라 하는 것이 최선이다.
여권과 렌터카 회사가 준비해 준 그린카드를 제시했더니 여권을 기계에 인식시킨 후 돌려주며 별말 없이 가라고 손짓해 주었다.
그동안 단체관광객들이 타고 있던 버스를 보았더니 거기에는 군인이 직접 버스에 올라 일일이 검문하는 것이 보였고 그 뒤에 기다리고 있던 버스의 단체관광객들은 기다리다 지쳤는지 버스에서 내려 몸을 풀고 있어서 통과시간이 개인 관광객에 비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되었다.
이것이 마지막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스니아 입국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입국 데스크의 직원이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영어로 뭘 원하느냐고 했더니 노 토크!라는 무뚝뚝한 답변이 돌아왔다.
친절했던 크로아티아와는 첫인상이 달랐다.
패스포트? 라고 했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7개의 여권을 주었더니 스캔을 뜨고는 돌려주어 차를 출발했다.
1분을 채 가지도 않았을 때 또 다른 검문소인지 요금소인지 모를 곳에서 직원이 손을 흔들며 차를 세우라고 하였다.
입국세를 받는 곳인지 통행료를 받는 곳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여간 그는 우리에게 노코인을 외치며 5유로를 지폐로 내야 한다고 했다.
10유로를 내밀었더니 거스름돈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데스크 전면에 카드 표시가 보이기에 10유로 지폐 대신 카드를 뽑았더니 그제야 손바닥 밑에 있던 돌돌 말린 5유로 지폐를 주면서 10유로 지폐를 받아 갔다.
한심했다.
어리숙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장난질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보스니아 공무원의 수준과 국격을 알만 했다.
부정부패가 심했던 우리의 과거를 생각하면서 차를 몰고 가는데 도로포장상태가 점점 나빠지더니 아예 도로 확장 공사 때문에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추억만 60년대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우리 몸도 6-70년대 도로 위로 올라가 버렸다.
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갔지만 출렁거림은 어쩔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렇게 20여 분을 더 달려 마침내 메주고리예 성당 주차장에 도착했다.
도착한 주차장도 주차구획 선도 그어지지 않은 맨땅인 데다 대형버스와 소형 승용차가 한데 뒤섞여 복잡한 상황이었다.
시간이 벌써 11시가 넘어서고 있어서 주차장은 차 댈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가득 차 있었다.
다행히 빈 곳을 발견한 우리는 차를 대고 우선 성당에 있는 무료 화장실을 찾았다.
모두들 한시름 던 후 성당으로 향했다.
토요일이지만 11시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성당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입장할 수 없었다.
보속을 요청한 성모님의 계시를 받들어서인지 성당 옆 공간에는 엄청나게 많은 고해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성당 정문으로 이동한 다음 정면에 있는 두 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성당 자체는 최근에 콘크리트로 지어서인지 아름다운 조형미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이곳 성당에서 미사도 드리고 성모님이 발현한 산등성이에도 직접 올라가 보면 좋겠지만 잠시 들린 터라 우리의 목적인 예수님의 오른쪽 다리에서 흘러나오는 성수를 적시기 위해 청동 고상을 찾아갔다.
가는 길 오른쪽 풀밭에는 빛의 신비를 표현한 5개의 조형물이 차례대로 설치되어 있고 길 좌우에는 높이 솟은 나무들이 좌우로 경비를 서듯 질서 있게 줄을 서 있었다.
대형청동고상은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상이라고 하는데 이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바닥에는 청동으로 예수님의 몸을 빈 공간으로 표현해 두었고 죽음에서 일어선 예수상은 팔을 벌린 채 푸른 공간 위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다.
그 오른쪽 다리 무릎 부분에 조그만 구멍이 있고 거기에서 성수가 조금씩 흘러나오는데 이 성수를 묻혀 환자의 아픈 곳에 대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무릎에 있는 조그만 구멍은 청동상을 만들 때 치밀하게 만들지 못한 하자라고 하겠고 거기에서 나오는 성수라는 것은 청동상의 내부와 외부와의 기온 차에 의해 생긴 이슬이 흘러내리다가 조그만 구멍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라 하겠지만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이슬로 많은 이들이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다고 하면 이미 과학의 경지를 넘어 신비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줄이 길게 서 있었다.
비가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사람들은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사람들의 숫자에 비해 줄이 좀처럼 줄지 않았다.
앞으로 다가가 보니 우측 다리 밑에 발받침이 설치되어 있는데 신자들이 그곳에 올라 먼저 기도를 한 후 우측 무릎 부근을 수건으로 열심히 닦고 있었다.
그런데 수건을 하나만 가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수량만큼 가지고 올라가 닦으니 대기 줄이 빨리 줄어들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기다릴 여유가 없거나 성미 급한 사람은 왼쪽 다리에 손을 대고 기도하고 접구한 후 떠나기도 하였다.
끈기 있게 30분을 기다려 우리 차례가 되었다.
모두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준비한 손수건으로 성수를 묻혀 내려왔다.
가톨릭 신앙이 없는 평촌 처형과 대구 형님 내외도 진실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성수를 묻혀 내려왔다.
일으켜 세워진 예수상의 발꿈치에 이어 뒤에는 수평으로 십자가 모양의 움푹 패인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일부 신자들은 아픈 이를 그곳에 누인 다음 안수 기도를 드린 후 일으켜 세워 가곤 했다.
그만큼 치유의 은사를 받고자 하는 기원이 간절한 것이리라.
그들에게 고통 없는 세상이 오기를 빌어 주었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성당으로 돌아오니 미사가 끝이 나 있었다.
우리는 잠시 들어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나와 성당 앞에 있는 성물방에 들러 기념품을 샀다.
이제는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할 시간.
미리 봐 두었던 빅토르 식당을 찾았더니 뷔페식 식당으로 자리가 만석이었다.
조금 더 길을 가다가 하천 너머 왼쪽에 피자집이 보여 그곳으로 들어갔다.
식당 이름은 RPM.
자다르에서 먹었던 맛있는 피자를 기억하며 우리는 맥주와 피자 3판을 주문해 먹었는데 자다르 못지않게 맛이 좋았다.
이제 두브로브니크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
3시간을 가야 하는 먼 일정이었는데 나는 맥주를 마신 대구 형님을 대신해서 운전대를 잡았다.
메주고리예 가는 길은 엄청나게 험한 길이라는 블로그를 보았던 나로서는 오전에 왔던 그 길이 그 엄청나게 험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이 길이 그 험한 길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메주고리예를 벗어나자 목가적인 그러나 삭막한 풍경의 마을들이 이어졌다.
흙이 없는 회색빛 돌산에 키가 작은 잡목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그런 풍경들이 이어졌다.
도로포장상태는 우리의 농로 수준으로 열악했고 도로 폭도 좁아서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조심해서 피해야 했다.
길은 산길로 이어졌다.
고도를 높이니 좌측으로 커다란 호수가 보여 전망은 좋았다.
길은 굽이굽이 돌아 급한 커브를 돌 때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자매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산 정상을 올랐다가 다시 내리막길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터널을 뚫는지 길을 확장하는지 공사 구간도 곳곳에 있었다.
잠시 내려왔던 길은 다시 산 정상으로 올라갔고 그 정상에는 돌로 만든 벙커가 좌우에 있었다.
아마도 내전 당시 도로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였다.
이제 산길은 끝이 났나 했더니 또다시 산 정상으로 험한 길이 이어졌다.
그렇게 세 번의 등산이 끝나자 보스니아의 유일한 바다로의 출구인 네움에 도착했다.
보스니아의 기름값이 크로아티아보다 저렴하다고 해서 이곳 네움에 있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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