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8-종묘와 사직

2022. 9. 11. 10:42국내여행

40년을 수도권에 살면서 처음 방문한 종묘와 사직.

은퇴한 후 서울 여행은 꼭 이곳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가 한국의 파르테논 신전이라 감탄하고 유홍준 교수가 수평의 미를 극찬했던 종묘.

조선왕조의 정신적 지주이자 통치의 정당성을 현양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을 두 곳의 제사 터를 방문하기로 했다.

아내가 모처럼 출근하는 때에 맞춰 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퍼부었다.

잠시 갈까말까 망설였으나 마음이 움직일 때 가보기로 했다.

1시간 동안 전철을 타고 종로3가역에서 내려 12번 출구로 나오니 바로 종묘 입구에 도착했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입구이고 우측에 매표소가 있다.

가까이서 본 정문

입장료는 천원...종묘의 가치에 비해 저렴한 입장료였다.

정문 왼쪽에는 월남 이상재 선생의 입상이 서 있다.

정전으로 가는 길.

사적지임을 알리는 비석과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있다.

정전으로 가는 길은 3개 구역으로 구분되어 박석으로 포장된 길인데 가운데 길은 조상의 영령이 다니는 신도-신의 길 이므로 다니지 말라는 안내 팻말이 곳곳에 부착되어 있다.

정문 좌측에 있는 연못.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난다는 원리를 연못으로 구현한 것으로...

우측에는 좀 더 큰 연못이 있다.

정전을 가기 전 우측에 있는 향대청.

제사를 지내기 위한 기물과 제수를 준비하던 곳이다.

제수는 음식모형이다.

술잔과 술을 따르는 국자 같은 제기들...

다음 건물은 제주인 왕과 세자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머물던 공간인 재궁.

여긴 왕이...

여긴 세자가 머물던 공간이다.

잔뜩 기대하고 갔던 정전은 수리 중...

이 사진은 정전 입구를 찍은 것이다.

비계를 이고 있는 정전의 현재 모습.

내년 6월까지 보수공사 중이란다.

광각 카메라가 아니고서는 한 프레임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건물이 크다.

부득이하게 인터넷에서 구한 사진으로 대신한다.

초기에는 작은 건물이었으나 모셔야 할 선왕이 늘어남에 따라 우측으로 증축하다 보니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수평선이 주는 장중함이 공간을 압도한다.

늘어선 기둥이 주는 감동적인 조형미...

 

종묘의 전체 모습을 알려 주는 안내판.

정전의 모형...

종묘대제 안내판...

종묘제례악의 원조인 중국은 막상 그 맥이 끊겨 우리의 종묘제례악을 보기 위해 중국의 전문가가 온다는...

정전 앞에 있는 칠사당.

그리고 좌측에는 배향 공신전이 있다.

정전의 배수시설

정전보다는 작은 규모이지만 같은 조형미를 느낄 수 있는 영녕전이 정전 우측에 있다.

영녕전 입구..

공연을 위해 좌석이 놓여진 영녕전 내부

외부 전경

지금은 공연장으로 사용 중인 듯...

출연자 임시 대기소

영녕전 가는 길에 있는 악공 대기소인 악공청

도심 한가운데 울창한 숲속에 600년 왕조의 혼이 서려 있는 소중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사와 관련하여 한 마디.

지금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대개 전통 있는 종가에서는 4대 봉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유교예법에 따라 왕은 4대, 선비나 사대부 양반은 2대, 평민은 부모만, 노비는 제사가 없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했을 때 4대 조상을 기려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왕호를 추증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대로 갈수록 조상숭배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너나없이 뼈대 있는 가문이라며 4대 봉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그에 따라 여성에 대한 노동착취와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는 폐단이 되었고 그 흐름이 지금껏 개선되지 못하고 이어지고 있다.

이런저런 상념속에 쉬엄쉬엄 종묘를 모두 둘러보는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근처에 있는 광장시장으로 갔다.

왕이나 양반과 같은 집권 기득권층과는 고민의 질과 결이 다른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시장통...

순대와 막걸리로 요기를 했다.

순대 7천 원. 막걸리 4천 원.

시장 물가가 오히려 더 비싼듯하다.

바로 옆은 청계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운동하는 회사원들과 어울려 종로3가역으로 걸어갔다.

얕은 물 속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잉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건천이었던 청계천은 악취가 풍기는 서울 도심의 하수구 역할을 하다가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때는 차량 통행을 위해 복개되었었다.

하지만 다시 공원으로 재개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평소에는 물이 없어 한강물을 끌어올려 흘려보내야 하다 보니 연간 100억 원의 비용이 든다는 비싼 도심공원이다.

단기간에 유적 보전이나 노점상 같은 서민의 삶을 무시하고 불도저 밀듯 이 공원을 만든 이는 대통령이 되었다가 현재는 수의를 입고 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사직단.

유교의 전례에 따라 정궁을 기준으로 왕이 남면, 즉 남쪽을 향해 자리를 잡으면 그 왼쪽에는 조상을 모시는 사당인 종묘를 배치하고 우측에는 사직단을 쌓게 된다.

그래서 가끔 사극을 보면 신하들이 왕에게 쓴소리를 할 때 은유적 표현으로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소서 라고 말하는데 알고 보면 이는 너 때문에 왕조가 망할 것 같으니 정신 차리라는 수위가 엄청 높은 비난성 발언인 것이다.

3호선을 타고 내린 경복궁역.

이런 설치미술 작품도 있고...

해 시계인 앙부일구의 모형도 있고...

임금님 행차도가 부조되어 있다.

경복궁역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사직단.

사는 토지신이고 직은 곡식을 주관하는 신으로 백성의 먹을거리를 위해 왕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원래 사직단에는 사신을 위한 사당과 직신을 위한 사당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시대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건물 터만 남아 있다.

언젠가는 옛 모습대로 복원되기를 바래본다.

동서남북 네 곳에 설치된 문이 모두 잠겨 있어 멀리서만 바라다보고 와야 했다.

왕을 비롯한 제관들이 머물던 공간은 복원이 되었나 보다.

다시 3호선을 타고 4호선으로 환승하여 귀가하니 오후 3시.

모두 5시간에 걸쳐 조선왕조의 정신적 지주였던 종묘와 사직에 대한 여행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