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30-아시시-카사레오노리호텔

2022. 7. 11. 11:11해외여행-이탈리아

로마를 떠나며 아쉬웠던, 가보지 못했던 여행지가 두 곳 있었다.

한 곳은 초기 가톨릭의 숨결이 남아 있는 카타콤-지하공동묘지로 이곳은 길을 잃을 염려가 있어 개별 입장은 불가하고 단체만 가능하다고 해서 가지 않았던 곳이다.

또 다른 한 곳은 성 밖의 성 베드로 성당으로 숙소에서 거리가 좀 있어 걸어가기에는 불가능하였고 또 다른 많은 성당을 방문한 터라 생략하였다.

숙소에 무사히 도착한 우리는 다음 여행지 아시시로 가기 위해 테르미니 역으로 갔다.

역에서는 스스로 개찰 절차를 밟아야 하므로 우리는 인쇄된 열차표를 접은 후 개찰구에 밀어 넣어 탑승 일시를 찍었다.

이 표시가 없으면 정상적인 티켓을 가지고 있어도 부정승차로 간주되어 벌금을 매긴다고 하니 귀찮더라도 잊지 말고 정해진 절차를 지켜야 한다.

이탈리아 열차 내에서 도난사고가 많다고 하여 우리는 4명이 마주 앉는 좌석을 둘이서 차지하고 그 가운데 여행 가방을 두었다.

다행히 승객이 많지 않아 별 문제가 없었는데 뒷자리의 젊은 청년들이 가는 동안 내내 떠들어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잦은 파업으로 결행이 많다는 걱정과는 달리 기차는 제 때 출발해서 제 때 정해진 곳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조금 이른 시간에 출발하는 경유 기차가 있었지만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내렸다 다시 타는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직행열차를 이용하였다.

아시시 역은 우리의 조그만 간이역처럼 작았다.

발권 창구도 직원도 따로 없이 건물 내 상점의 주인이 이 역할을 떠맡고 있는 것 같았고, 이 외에도 여행객의 가방 보관과 아시시 시내버스의 티켓도 이곳 주인에게 사야 할 정도로 매점 주인이 많은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아시시의 숙소는 역 근처에도 많이 있지만 중세 도시의 풍취를 간직한 아시시인 만큼 그 기분을 느껴 보려는 사람들은 올드 타운 안에 있는 숙소를 선택하기도 하고 또 한국 수녀님이 운영하는 수녀원에서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수녀원 숙소는 남성 단독의 숙박은 허용되지 않고 여성과 동행할 경우에 한해 허용된다고 하니 수녀원의 질박한 경험을 원하면 선택할 수 있다.

다만 단점은 도로가 모두 돌을 박아 만든 관계로 무거운 짐을 끌고 경사 급한 산길을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곤경은 피하고자 역 근처로 숙소를 정하였다.

 

도착 시간이 6시가 된 관계로 우리는 먼저 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호텔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호텔 이름은 카사레오노리. 3성급 호텔이었다.

외국에서 호텔 체크인은 처음인지라 조금 긴장되었으나 예약 바우처를 보여 주고 이름을 말하니 방 열쇠를 순순히 내어 주었다.

이틀 묵을 예정이었으므로 조식 장소와 시간 기타 유의 사항 등을 전달받고 배당된 방을 찾아 짐을 풀었다.

이곳은 이탈리아 중부지방의 조그만 도시로 숙박비가 저렴하고 시설과 조식이 다른 어느 곳보다 훨씬 좋았다.

석식은 제공되지 않아 우리는 간단히 씻고 근처 레스토랑을 찾아 피자와 맥주로 저녁을 때우고 아시시에서의 첫날 저녁을 보냈다.

 

아시시에서 저녁식사로 먹은 마르게리타 피자는 모든 이탈리아 피자의 어머니라고 한다.

나폴리 피자의 전형인데 얇은 밀가루 반죽 위에 토마토 페이스트, 모짜렐라 치즈와 바질 잎을 얹어 화덕에 구워내는 가장 간단한 피자로 치즈의 흰색, 토마토의 빨간색, 바질 잎의 초록색은 이탈리아 국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 피자를 기본으로 그 위에 고기와 야채, 소시지 등을 다양하게 올려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의 피자로 변주가 가능하다.

이 피자는 로마에 있을 때 민박집 사장님의 소개로 테르미니역에 있는 푸드코트에서 이미 먹어 보았는데 의외로 간단한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풍미가 좋았다.

또한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피자집에서 이 피자를 기본적으로 만들고 있고 피자 메뉴의 제일 첫 부분을 장식하고 있어서 마치 빅맥 지수처럼 이 피자의 가격으로 그 식당의 가격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곳 아시시의 피자 값은 6유로로 로마보다 2유로 정도 저렴했던 것 같다.

또한 이 피자의 크기가 직경 50센티미터 내외로 상당히 큰데 이 나라 사람들은 이 피자를 1인 1판으로 먹는 모양이라 동양인인 우리가 피자 1판과 샐러드와 맥주를 주문하자 웨이터의 태도가 곱상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식당 주인의 기분이 나빴거나 말거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둑어둑해지는 아시시의 밀밭 사이를 산책하였다.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에 있는 아시시!

산 중턱에는 프란체스코 성당이 황금빛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고 그 옆에서 명멸하는 올드 타운의 불빛은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검은 하늘에는 별이 총총 빛나기 시작하고 그 별빛은 검은 지평선 근처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이러한 아시시의 평화를 느껴 보고자 바다 건너 이 먼 곳까지 온 것이려니 하고 차가워지는 대기를 호흡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끝에 은퇴 후 유럽에서 한 달 살기 할 때 물가 싸고 공기 좋고 조용한 이 아시시를 근거지로 하면 좋겠다고 말하고는 웃었다.

프란체스코 성인은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손아래 동서가 이미 이 세례명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세례 받을 때 선택하지 못했던, 내가 좋아하는 성인이다.

이 성자는 아시시의 재벌 아들로 1181년에 태어났는데 젊은 시절까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마치 바오로 성인의 다마스쿠스 회심처럼 어느 날 갑자기 누리던 부를 던져버리고 청빈의 삶을 선택했으며 이후 평생 가난한 이와 병든 이를 위한 헌신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배를 타고 이집트로 가서 술탄을 만나 개종을 권유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물론 한칼에 거절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만...

선종시에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몸에 예수의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창에 찔린 옆구리의 다섯 상처-오상이 나타나 가톨릭의 공인을 받은 유일한 성자이기도 하다.

그를 따르던 남성 수도자들은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결성하고 그를 평생 도와주었던 클라라 성녀와 그녀의 뜻을 이은 여성 수도자들은 클라라 수녀회를 결성하여 그의 유지를 이어나가고 있다.

아시시는 그의 고향이자 활동기반이었으며 그의 유해는 이곳 프란체스코 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있다.